강변소식지

  최광혁(전 북한군 하사)
  사선을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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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을 헤치고
前 북한군 하사 / 최광혁

최광혁군은 1971년 7월 12일 평양에서 태어나 황해도 재령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가 6.25 참전 영웅이었기 때문에 많은 배려를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형제는 모두 7남매였다. 그는 여섯째인네 아들로는 둘째였다. 북한을 탈출할 당시 그는 강원도 인제 금강군 북한군 1군단 69포병 여단에 속해 있었고 계급은 하사였다. 그가 북한을 떠난 것은 배가 고파서도 아니고 엄밀한 의미에서 자유 때문도 아니었다.
그가 북한을 탈출하기 직전 견디기 힘든 충격적인 일이 연이어 그에게 일어났다.
손주들 중에서 자신을 가장 귀여워해주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부대로 왔다. 그러나 그는 초상에 가 볼 수 없었다. 그때는 김일성 사망 직후였기 때문에 남조선 아이들이 쳐들어 온다는 이유로 모든 부대원 이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었다. 또 얼마 있지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고, 다시 10년 가까이 뇌타박상으로 인한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다. 그 허무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집으로 달려가 그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싶은 미칠듯한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가누기 힘든 그리움을 치받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1개 중대에서 한달에 1명씩 사망휴가가 허락되었는데 그는 집에 갈 수 없었다. 돈 많고 힘 있는 아이들이 거짓 사망휴가를 내어 계속 휴가를 나갔다. 부모 없는 그 만이 계속 밀렸다. 이전의 아버지의 충성이 아무 쓸모 없었다. 자식이 초상에 갈 힘도 없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순간 이성을 잃었다.’
집으로 가고 싶은 열망은 급회전하여 방향을 틀게되었다. 처음엔 중국이었다. 그러나 옆 사단 아이가 중국으로 도망가다 잡혀 처형되는 사건이 터져 중국행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가기로 하였다. 고민 때문이었는지 탈출하기 전 며칠을 앓았다. 동무들이 먹을 것을 가져와 ‘광혁아’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광혁이는 이제 여기에 없어.’
95년 12월 20일 새벽 2시 그는 부대를 나왔다. 일단은 후방으로 나가 민가에 들러 집으로 간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탈영병 수색대가 집쪽으로 수색해 나가게 할 요령에서였다. 가는 도중 뜻밖에 소대장과 친한 친구를 만났다. 경비병이 않와서 찾으러 간다고 둘러대었다. 산속으로 들어가려할 무렵 벌써 수색대가 쫙 깔려 길목을 지키고 있어 두번째 그는 발각되었다. 대대로 연행된 그는 자신이 최광혁임을 부인했다. 군인 솜동복속에는 죽을시 확인하기 위하여 옷 임자의 관등성명이 새겨져 있는데 그들은 솜동복을 까뒤집어 이름을 확인하고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미리 다른 사람의 솜동복을 입고 떠났었던 것이다. 다시 그는 산속에서 낮을 보내고 밤을 타고 38선 쪽으로 계속 내려왔다. 통신병으로 배웠던 산 타는 기술, 나무 타는 기술을 모두 동원하면서 그는 추위와 굶주림을 견뎠다.
38선이 가까워 올 무렵 그는 다시 발각되었다. 칠흑 같은 밤이었는데 그가 내는 바스락 소리에 초소의 경비병이 ‘누구야?’하고 외쳤다. 아, 끝났구나 체념하고 두손을 들고 막 일어나려는 순간,‘나야.’하고 광혁의 뒤에서 누군가 초소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을 순찰하던 중대장인 것 같았다. 만일 그 사람이 후레시를 켜고 있었다면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광혁을 발견했을 것인데 그는 불을 켜고 있지 않았다.무사히 그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부대를 떠난후 사람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견딘지 사흘만에 드디어 그는 38선에 닿았다. 막상 38선에서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하는 자각과 이 선택이 오판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는 앞으로 나가지도 뒤로 물러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민했다. 南에 가면 한번 배신한자는 다시 배신한다는 선입견으로 변절자 취급을 하니 가 봤자 쓸데없다고 북에서 주입했던 교육과,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본능적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그러나 30분 후에 그는 일어나 남쪽으로 달려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달려갔던 곳은 지뢰가 무수히 매설되어 간첩들도 꺼리는 곳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알았다 하더라도 지뢰를 식별할 능력도 없었다. 그가 무턱대고 발을 디뎠던 그곳들이 천행으로 지뢰를 비껴난 것 뿐이었다.
95년 12월 23일 저녁 5시 30분 그는 귀순하였다.(그는 귀순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월남이라는 단어로 바꿔달라고 하였다.) 처음에 그는 군부대에 접수되었다가 안기부로 넘어가 6개월 동안 조사와 남한 사회 적응 훈련을 받았다.
그가 월남할 당시 강변교회의 김명혁 목사님은 극동방송과 복음주의 협의회와 더불어 북한동포돕기 운동의 일환으로 탈북자들을 교회에서 맡아 돌보자는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많은 탈북자 가운데 그가 강변교회와 결연이 되어, 96년 6월 30일 주일 강변교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날 김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북한 체제는 비판하지만 북한 동포는 사랑한다는 말에 감명을 받았고 찬송가의 그 생소한 곡조가 그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이병철 임춘여 당시 집사님 가정에 4박 5일 민박하면서 기대하지 못했던 환대와 정을 맛보았고 특히 그분들의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들로 생각하고 돌보아 주겠다는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집사님 가정과 헤어져 강변교회가 마련해준 오피스텔로 이사할때는 설명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는 지금도 임권사님을 지칭할때‘엄마’라고 말한다. 이때만 그의 음성에 밝고 명랑한 울림이 있다.
한동안 그는 강연을 다녔다. 그것은 그에게 꽤 좋은 수입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강연을 거절하고 있다. 작년 지방 어느 군부대에서 강연 도중 북의 어머니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올라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렸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그때 결심했다. 다시는 강연하지 않겠다고. 그는 그 결심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그는 가끔 술을 마시고 잠든다. 외로운 것은 공부에 열중하노라면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몰려오면 술을 마신다. 처음에는 소주 같은 독주를 마셨는데 지금은 캔맥주를 마신다. 그리움이 엷어지는 것일까?
특기할 것은 그에게 많은 사람들이 접근한다는 것이다. 형하자 동생하자 심지어 호적에 올려줄테니 양자하자는 사람까지 있고 방송에서도 수없이 그를 부른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것을 거절했다. ‘조용히 살고 싶어서’ 라고 그는 말한다.
北에서 그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누나가 넷이나 되어 누나들이 일하는 옷공장 피복 공장에 벤또밥(도시락)을 가져가면 누이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광혁이 왔네?’하며 사탕이나 껌을 입에 넣어주었다. 북에서는 국경일에 광장등에 남녀가 모여 규정춤을 추는데 이때 남녀의 사귐이 많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내가 규정춤이 캡이었거든!’뽑혀나갈 정도였다. 그래서 보리(북한의 은어:여자친구)는 많았다. 꽃(애인)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보리 하나 해줘하고 조를 정도였다.
2년전, 그는 잠시 강변교회를 떠났다. 교회에서 열받는 일이 있었다. 청년2부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어느날 살아온 내력과 종교에 대한 인식등을 써내라고 하였다. 그런 글은 안가에서 싫도록 써낸 것이었다. 교회까지도 그런 것을 써내야하는 것인가? 그는 쓰기를 거부하고 버티기로 하였다. 그러자 그가 북에서 과오를 저지른 자이기 때문에 쓰지 못한다는 말이 들렸다. 그는 강변교회를 떠나기로 하였다. 교회에서 받는 일체의 도움도 거절하기로 하였다. 자신은 법과 양심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의심 받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는 곧바로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작년 3월 그는 한양대학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그러자 김명혁 목사님이 그를 불렀다. 공부에 전념하려면 돈이 필요하니 교회의 도움을 거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는 끝까지 도움의 손을 놓지않는 그 말씀을 고맙게 여기고 다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 4월 학습을 받았다.
그는 충동적인 것 같지만 일견 아주 신중하다. 자갈돌 처럼 단단하고 감정을 잘 억제한다. 그는 아직 세례를 받는 것에 대해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술 담배의 문제와 감정과 가식에 흐르게될까봐 조심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속에 하나님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원하며 고민하고 있다.
그러나 강변교회가 어디 보다 좋다고 한다. ‘성도들이 점잖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옮겨심기워진 나무가 한동안 앓듯이,상처입으며 적응하여 그는 보통 대학생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수업하고, 도서관 가고,당구치고,노래방 가고, MT가고,토익 공부하고,취직 걱정하고, 28살이기 때문에 과에서 맏형 노릇하고... 다만 나라에서 마련해준 아파트에서 혼자 숙식을 해결한다는 것이 다를까? 남한에서 가장 좋은 것은 자유,가장 나쁜 것은 공기(空氣)라고 말하는 것과 또 통일이 되면 반드시 고향에 돌아가 南에서 배우고 익힌 것을 고향을 위해 쓰겠다는 결심도 다르다면 다를까?
(취재: 허영숙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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