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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
  교회는 어떤 곳인가?(17) “죽도록 충성하라고 부탁 받은 곳”
  

교회는 어떤 곳인가?(17) “죽도록 충성하라고 부탁 받은 곳” 2007. 12. 2.
계2:8-11

바로 어제 새가족반 성도들과 함께 만남의 시간을 가졌는데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23명이 한 자리에 함께 모여서 3시간 동안 사랑과 교제의 시간을 가졌는데 감사와 감동과 감격이 충만했습니다. 그 동안 새가족반을 통해서 신앙이 바뀌어졌고 인생이 바뀌어졌고 가치관이 바뀌어졌고 삶이 바뀌어졌다는 감사의 고백들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사와 감격이 가슴에 가득 찬 것이 마치 고무 풍선에 공기가 가득 찬 것과 같은데 혹시 고무 풍선이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까지 있다는 고백도 했습니다. 너무너무 감동적인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앞으로도 새가족반이 감사와 감동과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구역장반이 비슷한 분위기 가운데서 모였는데 거기에도 감사와 감동과 감격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목회도 행복도 모두 만남과 나눔과 기쁨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주고 받습니다. 사랑의 마음과 그리움의 생각을 주고 받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미국으로 간 초등부 어린이가 저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그리움의 마음이 가득히 나타나 있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 예주 예요. 기억 하시죠? 이때까지 메일 못 드린 건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한국인한테는 한국이 제일인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싫다는 거는 아니에요. 거리도 깨끗하고 다 좋은데, 조금 외로워요. 강변교회가 너무 그립고, 제가 다니던 학교도 너무 그리워요. 목사님도 너무 그립고, 장영환 전도사님도 그립고요. 목사님, 제가 여기서 영어 빨리 배워서 한국 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리고 제 초등부 담임 선생님 정순원 선생님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제가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는 당장 그 일요일에 강변교회 부터 갈거예요. 목사님, 제가 강변교회갔을때도 계속 강변교회에 꼭 계세요~~” 그리움의 마음이 절절히 나타나 있는 너무 예쁜 편지입니다. 저는 즉시 예주에게 답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예주가 보낸 그리움과 사랑이 가득히 담긴 마음의 글 너무너무 반갑게 받았다. 사실 목사님은 예주가 메일을 빨리 보내지 않아서 실망할 뻔 했는데 좀 늦게라도 아름답고 멋진 카드 메일을 보내주어서 실망대신 희망을 지니게 되었다. 예주가 미국에서 돌아올 때 내가 다른 곳에 가 있다가도 예주가 온다고 하면 곧 강변교회로 달려와서 예주를 반갑게 만나고 예주를 꼭 안아주겠다.” 편지를 주고 받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물론 편지를 주고 받을 때 슬픔과 아픔을 느끼는 일도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북한에 계시는 저의 어머니가 미국에 있던 저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편지에는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이 진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휼늉하게 된 내 아들을 나는 보고 십고나. 손이라도 한 번 꽉 쥐어보고 십고나. 몽중엔들 이저스랴 내 명혁이.”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소 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들에는 슬픔과 탄식과 책망도 나타나 있었고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도 나타나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들 중 다섯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슬픔과 탄식과 책망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네게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계2:14). “네게 책망할 것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계2:20).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간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5,17). 주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들이 주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과 정절을 저버리고 세속주의에 푹 빠져서 가련하게 된 교회들을 바라보셨을 때 주님의 마음에는 슬픔과 탄식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곱 교회들 중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말씀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가”(계3:8).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아마 예수님께서 주기철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평양의 산정현 교회나 손양원 목사님이 목회하시던 여수의 애양원 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셨다면 꼭 같은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축복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을 것입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가”(계3:8).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그런데 70여 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교회들에게 주님께서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과연 어떤 편지를 써서 보내실지 모르겠습니다. 옥한흠 목사는 주님께서 지금 한국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실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 저는 주님께서 지금 한국교회에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다음과 같이 써서 보내실 것 같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간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너무 부정적인 말을 자주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써서 보내신 위로와 칭찬과 격려와 부탁과 축복의 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써서 보내신 편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을 아신다’는 위로와 칭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알아주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나의 안고 일어섬을 아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다”(시139:2-4). 고난 당하던 욥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환난과 궁핍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평안을 좋아하고 부요함을 좋아하는데 서머나 교회는 주님을 인해서 주님을 위해서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위로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그리고 서머나 교회가 처했던 환난과 궁핍이 주님의 눈에는 환난과 궁핍으로 보이지 않고 부요함으로 보였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이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 서머나 교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성 프랜시스가 가난하고 또 가난했지만 주님의 눈에는 부요하고 또 부요한 제자로 보였을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환난을 당하고 또 환난을 당했지만 주님의 눈에는 영적인 부요함을 지닌 승리자들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에게 이렇게 속삭였을 것입니다. “내가 너희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너희가 부요한 자니라.”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이만열 교수는 최근에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너무 강해지고 너무 부요해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너무 강해졌고 너무 부요해졌고 너무 편안해졌습니다. 중세교회가 너무 강해지고 너무 부요해졌을 때 극심하게 타락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환난과 궁핍을 일부러 극성스럽게 병적으로 추구할 필요는 없겠지만 편안과 부요를 너무 좋아하고 너무 추구할 때 교회와 성도들은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는 주님께서 알아주시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영적인 부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축복 받은 교회였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이것이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써서 보내신 편지의 첫 번째 부분이었습니다.

둘째,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환난을 받게 된다’는 예고와 격려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격려가 됩니다. 그리고 그 길이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과 환난을 받는 길임을 보여주시는 말씀이라면 그것은 대단한 격려가 되는 말씀일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지금도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환난을 받지만 앞으로도 십일 동안 환난을 받게 된다는 말씀은 대단한 격려의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해서 환난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환난을 당하는 것이 불행한 일도 아니고 저주스러운 일도 아니고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축복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런 말씀을 아무에게나 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에게만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다메섹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한 사울에게나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6). 디베랴 바다가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사도 베드로에게나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주님을 따르던 처음 열 두 제자들에게나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10:16,17,21,22). 예수님께서는 그 사역의 초기에 주님을 따라서 산에 올라왔던 처음 제자들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마5:11).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 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라고 미리 예고하신 격려의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것이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써서 보내신 편지의 두 번째 부분이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는 부탁과 축복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죽도록 충성하라는 부탁의 말씀은 무거운 말씀이었지만 사실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과 서머나 교회의 감독에게나 부탁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말씀이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또는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며 충성할 수 있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나 이순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나 유관순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나 주기철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나 손양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사람들만이 나라를 위해서 또는 주님을 위해서 죽음으로 충성할 수가 있습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나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는 주님께서 그런 부탁을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서머나 교회나 산정현 교회나 애양원 교회에게 부탁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1:2)는 축복의 말씀을 붙잡고 살지 않았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부탁의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사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생명처럼 귀하게 붙잡고 사신 말씀이 바로 계2:10 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인 정양순 사모님도 계2:10 말씀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며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을 든든히 붙잡고 살았습니다.
여수 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목사는 광주 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는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 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는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부탁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딸 손동희 권사는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 ‘어디로 가십니까?’ ‘광주로 ...’ 채 대답을 다 듣지도 않고 어머니는 숨겨 가지고 온 성경책을 펼쳤다. 반갑다고 인사나 나누고 안부나 물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어머니의 마음은 조급하기만 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어머니는 보통의 어머니들처럼 남편의 육신의 삶을 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가장 많이 걱정한 것은 아버지가 당할 고초가 아니라 혹시 아버지가 마음이 약해져서 우상숭배하는 죄를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1:2)는 축복의 말씀을 붙잡고 살지 않았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순교의 말씀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서머나 교회에 보낸 최상의 격려와 최상의 축복의 편지였습니다. 환난과 궁핍에 처한 서머나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는 불행하고 불쌍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눈에는 서머나 교회가 조만간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영광스런 존재로 축복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 최상의 축복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 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10:20). 그런데 그것보다 더 크게 기뻐할 일은 하늘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고난과 환난과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데반에게 그 면류관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 면류관이 주어졌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예비된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달려갈 길을 달려갔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딤후4:7,8).
당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도 주님께서 주시 마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환난의 길을 기쁨으로 달려갔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이 주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때는 서기 95년 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65년이 지난 서기 155년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로마 총독에게 붙잡혀서 서머나 투기장에 끌려와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붙잡혀온 폴리캅을 향해서 로마 황제를 신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저주하지 않으면 야수들에게 던져서 죽게 하든지 불에 태워서 죽게 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고백했습니다. 폴리캅은 65년 전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써서 보낸 편지의 구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폴리캅은 입을 열러 로마 총독 앞에서 그리고 그를 죽이라고 아우성치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큰 소리로 고백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 분은 나에게 한 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 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그리고 하늘을 향해서 이렇게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나님, 내가 당신께 찬양을 올립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올립니다.” 폴리캅은 감사와 찬양의 기도를 마친 후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폴리캅은 그 길로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면서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았을 것입니다. 폴리캅은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그대로 받아드렸고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초대교회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신다면 과연 어떤 내용의 편지를 써서 보내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지금 환난과 궁핍을 모르는 불행한 시대, 순교를 당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에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늘의 면류관이 아닌 이 세상의 면류관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을 수 있는 환난과 궁핍이 그리워지는 시대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메마른 저주의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당할 수 있는 순교가 그리워지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환난과 순교를 당하는 것은 주님을 가장 친밀하게 닮으면서 걸어가는 길이고 저주의 땅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 길입니다. 물론 광신적으로 병적으로 환난과 순교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탁하신 환난과 궁핍과 죽도록 충성하는 길을 피하려는 것은 더욱 더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60여 년 전에 주기철 목사님과 김화식 목사님 등을 통해서 평양교회에게 보내신 주님의 편지의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의 구절도 옛날 서머나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구절과 같은 구절이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저도 폴리캅처럼 65년 후에도 그 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여러분들도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너무 부담스러운 말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길이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고 가장 축복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셨던, 서머나 교회의 사자 폴리캅에게 주셨던 환난과 궁핍의 축복, 죽도록 충성하는 축복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쇄하기] 2007-12-02 1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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