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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
  교회는 어떤 곳인가?(20) “열심을 내어 회개하여야 하는 곳”
  

교회는 어떤 곳인가?(20) “열심을 내어 회개하여야 하는 곳” 2007. 12. 23.
계3:14-22

저는 인생은 만남과 나눔이란 말과 함께 인생은 편지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성경이 바로 만남과 나눔의 이야기이고 성경이 바로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보고 싶음과 그리움의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받는 것이 인생입니다. 때로는 서글픔과 아픔의 마음을 담기도 하고 때로는 충고와 책망의 마음을 담기도 합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에 저의 어머니가 사랑과 보고 싶음과 그리움과 슬픔의 마음을 담아서 저에게 써서 보낸 편지를 지금도 찬송가 속에 담아가지고 다닙니다. 지금 미국 LA에서 살고 있는 김홍영 집사와 박정희 집사 부부가 강변교회를 그리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목사님 안녕하세요. 늘 강변을 그리워하면서 연락이 늦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캐롤송이 울리네요. 그런데 목사님 저는 강변이 그리워요. 눈이 하얗게 온 새벽송이 그립고 촛불 예배도 그립고. 올해도 새벽송을 돌으실거죠. 목사님 저희 가족도 빨리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김집사와 백기. 범기 모두 잘 있습니다. 목사님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고 즐거운 성탄절이 되세요. 사랑하는 강변식구들 메리크리스마스...” 지금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곽한상 김세영 선교사 부부도 감사와 사랑과 그리움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김명혁 목사님 사모님, 그리고 교역자님들과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모든 강변교회 식구들에게 성탄과 새해의 인사를 드립니다. 강변교회의 사랑의 음악회가 그리워지고, 새벽송과 성가대의 칸타타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분주해지기 쉬운 이 때에, 한 해 동안 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헤아리며, 주님과 더 진하게 동행하는 새해를 다짐하는 시간 되시길… 감사와 사랑을 담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지금 부산에 계시는 박준희 권사님도 사랑과 그리움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멀리 있어도 날마다 생각하고 그리운 두 분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지금 미국 LA에 있는 신명주 집사님도 사랑과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늘 강변교회와 목사님 사모님을 그리워 하면서도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느덧 2007년도도 다 가고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은 특히나 두 분과 강변교회가 그리워서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속히 뵐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던 목사님의 말씀이 아직도 내 귓전에 들립니다. 감사가 감사를 낳는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것을 이곳에서 늘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그리고 사모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두 분을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감사하다는 말씀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분을 영원토록 귀히 사용하실 것을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담임목사님이 강변교회를 잘 섬기시길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보고 싶습니다.” 우리 청년2부 청년들도 저에게 감사와 사랑의 성탄 카드를 써서 보냈는데 그 중 두 개만 소개합니다. “목사님~^^ 담임 목사님으로 귀한 사역 하시고 따뜻한 사랑과 소중한 가르침 주심을 가슴 깊이 새깁니다. 목사님의 은퇴가 참 낯 설고 적응이 안되네요. 강단에 서신 모습 뵈면 너무 굳건해 보이시고 열정이 넘치시는데요 ^^ 앞으로 하실 일 많으시고 비젼도 크신데 더욱 건강하시고 성령 충만하시길 계속 기도할께요. 목사님 사랑합니다.!” “목사님!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사랑해요. 다음해부터 같이 하지 못한다는게 많이 아쉽고 슬프지만 더욱 더 귀하게 쓰임 받으신 목사님을 기대합니다.! 항상 ‘권혜진~’ 하며 손 잡아주시고 안아주시는 울 목사님 너무 보고 싶을 거에요. 목사님 너무너무 사랑해요. 앞으로 목사님의 가르침들 잊지 않고 지키며 신앙 생활 열심히 할께요. 사랑해요.” 오늘 아침에는 혜성이와 지성이 어린이도 예쁜 카드를 써서 나에게 주었고 혜진이와 윤모도 예쁜 카드를 써서 나에게 주었고 재희도 영어와 한글로 쓴 예쁜 카드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모두모두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편지들입니다.
그럼 편지 이야기는 그만 하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성탄의 계절은 주님을 무지무지하게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계절이고 가족과 친구와 그리고 성도들과 사랑을 주고 받는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에 나오는 젊은 부부는 서로에게 진한 사랑이 담긴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 받습니다. 아내 델라는 황금폭포처럼 아름답게 물결치는 자기의 머리 칼을 팔아서 백금 시계줄을 사서 남편에게 선물하고 남편 짐은 자기의 시계를 팔아서 보석이 달린 머리 빗을 사서 아내에게 선물합니다. 사랑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보배로운 것인데 성탄은 이와 같이 아름답고 보배로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된 계절입니다. 사랑으로 구유에 오신 주님께서 사랑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사랑으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권면의 편지를 써서 일곱 교회에 보내셨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여섯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써서 보내신 ‘칭찬과 격려’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내신 편지를 읽으면서 그 편지는 바로 주님께서 저에게 보내신 편지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왕자 병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주님께서 일곱 번째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써서 보내신 ‘책망과 권면’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현대인들은 ‘책망’의 설교 듣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칭찬과 축복’의 설교 듣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책망과 권면’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기 때문에 저도 할 수 없이 ‘책망과 권면’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일곱 교회에 보내신 편지들 중에서 ‘칭찬’의 말씀은 두 번밖에 안 하셨고 ‘책망’의 말씀은 다섯 번이나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이 ‘책망’의 말씀을 더 많이 들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사랑으로 써서 보내신 ‘책망과 권면’의 편지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첫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않다’는 말씀은 삶에 대한 의욕과 열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생활은 물론 인간 생활 전반에 대한 의욕과 열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명도 없고 사랑도 없고 열성도 없고 보람도 없이 할 수 없이 살아가는 무기력한 인생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들이 돈에 대한 열성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두 부자였습니다. 정치적인 열성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모두 정치적인 권력도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삶에 대한 의욕과 열성은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에 대한 의욕과 열성은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헌신과 희생에 대한 열성도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와는 정 반대의 형편에 처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었지만 영적인 부요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재력이나 정치력은 지니지 못했지만 영적인 부요함을 지니고 신앙 생활과 봉사 생활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과 헌신과 희생이 뜨거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를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계2:9). 그런데 세상적으로 부요한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 생활에 대한 열성을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파라독시칼한 존재이고 아이러니칼한 존재입니다. 역설적이고 모순되고 불합리한 존재입니다. 환난과 궁핍 가운데 있을 때는 신앙 생활을 열성적으로 하다가 평안과 부요 가운데 있을 때는 신앙 생활을 미지근하게 하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말세 교회를 대표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 생활의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다 아시고 다음과 같이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이 책망의 말씀은 2천년 전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었지만 사실은 말세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에 하시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둘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부자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가난한 자니라” 라는 책망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기 부자라는 말은 영적인 부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물질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부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육체적이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부를 쟁취하려고 애를 쓰고 권력을 쟁취하려고 애를 쓰고 명예를 쟁취하려고 애를 쓰고 쾌락을 쟁취하려고 애를 쓰고 성공을 재취하려고 애를 쓰면서 육체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불신자들도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신도들도 목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드온도 마찬가지였고 삼손도 마찬가지였고 솔로몬 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부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권력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데 부와 권력을 너무 좋아하고 탐하면 그래서 부와 권력을 지니게 되면 조만간 믿음과 사랑이 식어지게 됩니다. 신앙 생활이 미지근해집니다.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게 됩니다. 타락하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부요함은 지니고 있었지만 영적인 부요함은 상실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교회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부요함과 함께 종교적인 부요함을 지니면서도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가장 종교적이었는데 영적으로는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고 베인톤 교수가 지적했습니다. 교회의 예배의식과 프로그램이 풍부하고 다양하고 화려하면서도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부족한 것이 없는 부요한 교회였고 멋진 교회였고 화려한 교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면서 자랑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가난하고 가련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인 권력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예배 의식과 프로그램도 풍부하고 다양하고 화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인 부요함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앞으로 더 큰 부를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큰 정치적인 권력을 지니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배가 더 화려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더 심각한 영적인 위기를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300여 년 동안 열 번의 극심한 박해를 받았던 초대교회가 서기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서 종교적인 자유와 정치적인 자유와 경제적인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을 때 영적인 위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초대를 받아서 세계 곳곳으로부터 온 교회의 지도자들이 황제의 궁전에 함께 모여서 감격의 예배를 드리면서 기독교의 승리를 구가했을 때 초대교회가 영적인 위기를 맞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때부터 기독교의 타락이 시작되었다고 교회사가들이 지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세 교회가 13세기에 이르러 최고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종교적인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때 기독교는 역사상 최고조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를 위해서 기도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명박 당선자는 실용주의적 경제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훌륭하게 수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대형 교회의 목회자들이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부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정교유착이 심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이미 그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부와 결탁하면 교회는 반드시 타락하고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적이고 형식적인 부요함을 지니고 그 대신 영적인 부요함을 상실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련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라오디게아 교회는 영적으로 가련하고 가난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고 영적으로 눈이 멀었고 영적으로 벌거벗은 부끄러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고 가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셋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서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라. 그리고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부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서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부귀와 영화와 장수를 사라고 하지 않았고 금과 흰 옷과 안약을 사라고 권면했습니다.
첫째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분부했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순수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다니엘의 믿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믿음, 욥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흥분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고 의지도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항복의 믿음 겸손의 믿음 순종의 믿음 헌신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사라고 분부했습니다. 믿음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너희 목 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옵소서!”
둘째로, 흰 옷을 사라고 분부했습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여기 흰 옷은 십자가의 피로 깨끗하게 씻어진 의의 옷을 가리킵니다. 계7:13,14에 흰 옷 입은 자들이 나오는데 저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의의 옷을 입은 무리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7:14). 흰 옷이 우리들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사라고 분부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들의 더러워진 죄악의 옷을 어린 양의 피로 날마다 희게 씻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1:18).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를 날마다 피로 씻어서 정결하게 하시옵소서!”
셋째로, 안약을 사라고 분부했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여기 안약은 밝히 보게 하여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가리킵니다. 엠마오로 걸어가던 두 제자가 눈이 어두워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었는데 주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시고 떡을 떼어 주실 때 저희들의 눈이 밝아져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 인줄 알아보더니”(눅24:30,31).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주님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계1:10,12). 사도 요한은 그 후부터 “내가 보니, 내가 들으니”를 반복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을 때 우리는 정치계와 경제계를 보는데 머물지 않고 주님과 영계와 천계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주님은 계속해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면서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다섯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결론도 회개였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신 편지의 결론도 회개였습니다. 사실 회개는 신앙 생활의 서론이고 결론입니다. 처음과 나중입니다. 회개 없이는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고 소망도 없고 구원도 없고 기쁨도 없고 천국도 없고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도 한경직 목사님도 김치선 목사님도 박윤선 목사님도 마지막까지 회개를 힘썼습니다. 회개가 무엇입니까? 박윤선 목사님은 회개의 특징을 세 가지로 간략하게 설명했습니다. 회개는 죄를 슬퍼하는 것이고, 회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고 그리고 회개는 심령으로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죄를 슬퍼하면서 우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말로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닌 심령으로 가슴으로 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심령을 가질 때 금과 같은 믿음도 사게 되고 피로 씻은 흰 옷도 사게 되고 성령으로 만들어진 안약도 사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게 되고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도와주셔야 참된 회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간절하게 힘써야 참 된 회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만들어 달라고 처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은 주님께서 회개하는 자의 마음과 몸 속에 들어와서 계신다는 축복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내 마음과 몸 속에 들어와 계신다는 사실은 천지가 개벽할 놀라운 사건이고 천사도 놀라서 기절할 놀라운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너무너무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위해서 축원합니다. 이번 성탄에 여러분들께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마음을 열고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므로 주님을 여러분들의 마음과 몸 속에 모시고 사시는 놀라운 축복을 평생토록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인쇄하기] 2007-12-23 10:3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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