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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을 말한 것을 반성합니다" 기독교연합신문(99.8.23)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합동신학대학원)
며칠 전 필자는 MBC방송의 "여성시대" 프로 진행자가 청취자가 써 보낸 글을 읽으면서 심각한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아니, 나 자신도 비슷한 좌절과 허탈감에 빠지고 있었다. 청취자가 써 보낸 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자기는 지금 고해 성사하는 심정으로, 선생님에게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반성의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상식적인 말을 지껄였는데 그것을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즉 친구들에게 "어떻게 엄연히 법이 있는 민주 평등사회에서 부정을 범한 전직 대통령의 아들 김 모씨가 사면이 될 수 있겠느냐"고 상식적인 말을 지껄인 것을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즉 자기가 상식적인 말을 지껄인 지 며칠 후 김 모씨가 대통령에 의해 사면되었다는 보도를 읽고 자기의 잘못을 반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 아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항상 상식적인 말을 한 것을 아울러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의 글 안에는 비꼬는 듯한 투의 말은 하나도 없었다.
방송 진행자는 청취자가 보낸 반성문을 방송을 진행하다 말고 몇 번이나 거듭해서 되 뇌이면서 우리 사회의 통탄스러운 모습을 지적했다. 국가가 수여한 훈장을 국가에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 가기로 결심했다는 어느 국가 운동선수 주부의 서글픈 이야기를 곁들이며 통탄해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진지한 반성문을 써 보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우리 사회에 아직 소망이 있음을 말해 준다고 애써 자위하기도 했다.
최근에 40여년 만에 귀국해서 1년 동안 미국 군인 영관 및 장성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친구 목사가 필자에게 심각한 말을 했다. 한국 사람들이 너무나 거짓되고 불친절하고 무질서한데 그런 잘못된 습관들을 좀 고칠 수는 없겠느냐는 것이었다. 미국 군인들이 복무지나 휴가지로 일본은 너무나 좋아하지만 한국은 너무나 싫어하고 있으니 안타깝다는 것이었다. 강원도의 식수가 미국에서 생산되는 식수보다 훨씬 질이 좋은데 왜 물까지 미국에서 가져 다가 마셔야 하느냐고 질문을 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강원도의 물이 더 좋은 물이라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그 물이 강원도에서 온 좋은 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느냐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잠간 한국을 방문한 장성 몇 사람들이 서울 시내를 운전하며 지나가다가 시내 버스들이 빨간 신호등에도 그대로 지나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해서 빨리 한국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속히 귀국하자고 말하더라 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한국 사람들이 잘못을 고치는 개혁운동을 펼 수는 없겠느냐고 필자에게 안타깝게 호소했다.
모주간신문의 편집국장인 C 모씨가 몇 시간 전 필자에게 전화를 걸고 이 사회와 교회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글을 좀 써 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즉시 "글은 써서 무얼 합니까? 글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을 아무리 잘 해도, 글을 아무리 잘 써도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말도 은이고 글도 은이지요. 삶이 금인데 지금은 삶이 없습니다. 삶의 모델이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더니 그러면 글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글이라도 써 달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지금 글이 아닌 "넋두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독자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면 머리 숙여 사죄하며 반성한다.
지금은 멋있는 글이 별로 필요 없는 시대 같다. 지금은 감동적인 설교도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시대 같다. 지금은 그럴듯한 구호도 별로 필요하지 않은 시대 같다. 물론 아직도 어리석은 대중은 자기의 이해관계 때문에 그럴듯한 구호에 속아 넘어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중도 차츰 어리석음에서 깨어나고 있다. 그럴듯한 설교나 구호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 알아차려 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삶이 필요한 시대이다. 진실한 삶, 사랑의 삶이 필요한 시대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가? 누군가가 삶의 모델을 보여 주어야 한다. 우리 속에는 이상한 기질이 수 백년 동안 자리 잡고 있다. 거짓되고 무질서하고 불친절하고 배타적인 기질이 우리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기질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충격과 감동을 받을 때 그리고 부단한 노력과 훈련을 통해서 이런 잘못된 기질도 조금씩 바꾸어질 수는 있다. 그런데 어떤 충격과 감동이 멋있는 말이나 글에서 오지는 않는다. 삶의 모델에서 온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모델이다. 진실한 삶, 사랑의 삶의 모델이다.
어떤 사람이 일본에 가서 여행을 하다가 잃어버린 자기 지갑을 찾아서 돌려준 어느 일본 사람의 정직하고 친절한 행동에 충격을 받고 자기도 정직하고 친절한 삶을 실천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정직과 친절을 조금씩 실천해 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이름도 없는 한 노인이 평생 아껴서 저축한 10억원을 어느 자선 단체에 아무 조건도 없이 기증했다는 신문 보도를 보고 충격을 받고 자기도 조금씩 이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남을 돕는 일을 조금씩 시도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전에 맛보지 못하던 삶의 보람과 기쁨을 누리며 거짓되고 불친절하고 이기적이고 인색했던 우리들의 못된 기질과 습관을 조금씩 바꾸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닌 삶의 모델이다. 진실한 삶, 사랑의 삶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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