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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결에서 화해로 조선일보 시론 (1997.11.30)
김명혁 목사 (강변교회, 합동신학대학원)
지금 우리 사회는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다. 정치가 그렇고 사회가 그렇고 남북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국민들의 마음은 어둡고 답답하다. 국민들의 마음을 좀 밝고 시원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없는가? 국민들은 어둡고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잠시나마 월드컵 축구 경기장으로 달려간다. 마치 월드컵 축구 경기가 나라를 살리기나 할 듯이 온 국민의 마음이 그곳으로 집중한다. 그러나 그곳에도 적대와 대결의 기운은 여전히 비등하다. "붉은 악마들"이 날뛰면서 "일본 타도" "최후의 날" 등의 구호를 무섭게 외친다. 한국 축구팀이 일본 팀에 무기력하게 패했을 때, 온 국민은 허탈감에 빠졌다. 적대와 대결은 이긴 자에게는 승리의 쾌감을 잠시 가져다 줄 수 있지만 진 자에게는 패배의 허탈감을 가져다 주며 그 허탈감은 또 다른 적대와 분노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일전이 끝났을 때 필자는 친구이자 일본교회의 지도자인 죠수아 쯔타다 목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라고 환호하다가 필자가 전화한 것을 알고서는 다소 당황해 했다. 그러나 필자가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말했을 때 쯔타다 목사는 참으로 고맙다는 말을 연발했다. 1분정도 통화한 전화였지만 우리 두 사람의 마음에는 잔잔한 흐믓함이 오래 오래 남아 있었다. 사실 필자는 지난 10여년 동안 한일간의 화해와 협력을 이루는 일에 최선을 다 했는데 그동안 감동적인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적대와 대결을 정당화하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될 때 TV 드라마 「용의 눈물」에 방영되는 부자상쟁과 같은 비극이 있을 뿐이다.
1972년 6월 미 공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알몸으로 울부짖으며 도망치던 9살난 베트남 소녀의 비참한 모습을 우리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적대와 대결의 냉전시대가 빚은 비극의 한 장면이었다. 필자는 지난 6월 34세가 된 킴 푹씨를 카나다에서 만나 그녀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분노와 적개심으로 불타던 그녀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차츰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고백중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바로 1년 전 자기 몸에 네이팜탄을 투하했던 그 당시의 공군 군인을 만나서 그를 용서했다는 대목이었다. 유네스코는 최근 킴 푹 여인을 평화의 대사로 임명한다고 발표했다. 적대와 대결의 삶이 화해와 평화의 삶으로 바꾸어 지는 것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부터 일본을 싫어했고 공산주의 북한을 싫어했다. 공산주의 북한이 싫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만 11살 때 혼자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필자는 그 후 신앙의 자유를 누리며 반공 정신을 선양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10여년 전 부터 통일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남북의 대결보다는 민족화해가 남북 평화통일에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무조건 돕는 일이 민족의 화해를 가져오는 지름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우리는 1948년 여수 순천 반란시 자기의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당 청년을 용서하고 자기의 양자로 삼은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안다. 그와 같은 일은 오늘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는 반공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대북정책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은 손양원 목사의 숭고한 인도주의적 행위는 민족화해의 기초를 놓은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지금 이와 같은 인도주의적 정신을 이어받아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의 화해를 도모하며 굶주리는 동포들을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종교간의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는 일이야 말로 적대와 대결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를 건강하고 밝게 만드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피 속에는 적대와 대결을 정당화하고 격려하는 지역주의 또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흐르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불행한 역사가 물려준 것이고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이기주의가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우리는 이제 민족의 평화 통일과 세계화를 이룩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안고 있다.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적대와 대결」의 정서를「화해와 협력」의 정서로 바꾸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결코 정치적인 구호로 이룰 수 없다. 인도주의와 종교적 명제인 화해를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