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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혁 목사
  교회는 어떤 곳인가? (7) "환난과 순교를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
  

교회는 어떤 곳인가? (7) "환난과 순교를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 2007.8.19.
행8:1-4, 계2:8-11

지난 주일 우리는 독일에서 오신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통해서 매우 귀중한, 통찰력이 있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부흥 10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것은 회개라고 지적했습니다. 지난 50여 년 동안 환난을 모르고 지내온 한국교회가 이번 아프간 사태로 환난과 순교의 의미를 되 새겨야 한다는 의미 심장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설교의 일부를 다시 인용합니다.
“2007년은 한국교회에 있어 의미 있는 해 입니다. 평양에서의 100년 전 부흥운동은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한 장로님이 대중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입니다. 이 죄 고백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많은 사람들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한국교회 전체에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백 년이 지난 지금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한다면 무엇을 하여야 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참된 부흥을 원한다면 백 년 전 한 장로님이 죄를 고백했던 것처럼 죄를 고백하는 참된 회개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벌써 2007년이 지나가고 있는데 괄목할 만한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즉 23명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프카니스탄 탈레반에게 잡힌 일입니다. 이것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뒤흔든 사건입니다. 이번 아프간 사태는 1907년 평양대부흥 1백 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1백 주년을 맞는 한국교회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환난과 순교의 축복을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평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이때야 말로 갈보리의 주님을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때이며 주님의 고난에 부분 부분 참여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교훈은 우리가 환난과 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교훈을 2007년에 터득한다면 한국 교회는 새로운 갱신, 새로운 부흥을 체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통찰력 있는 말씀을 들으면서 한국교회가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 성장과 교회 부흥에 눈이 어두워서 참된 교회가 항상 지녀왔던 교회의 표지인 환난과 순교의 덕목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가 지녔던 표지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서로 교제하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기도하기를 힘쓴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구제하며 봉사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고, 전도하고 선교한 것이 하나의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를 예루살렘 교회가 지니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그 시초부터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그 시초부터 환난을 교회의 표지로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저희를 잡으매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나”(행4:1-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하더라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4:23-31). 예루살렘 교회가 표지로 지녔던 환난이 예루살렘 교회에 가져다 준 것은 뜨거운 기도와 담대한 전도였습니다.
사도행전 5장도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을 교회의 표지를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저희가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 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17-41).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으로 인해 더욱 더 뜨겁게 기도했고 더욱 더 담대하게 전도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은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운 표지로 지녔던 것을 기록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4-60). 예루살렘 교회는 환난과 순교로 인해 천국의 주님을 영광스럽게 증거하는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8장도 예루살렘 교회가 환난과 순교로 인해서 사마리아와 가사 광야와 아소도와 가이사랴 등 이방의 땅으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일을 기록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행8:1-4).
사도행전 9장 10장 11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환난과 박해로 인해서 복음이 가이사랴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까지 전해진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11:19-21).
사도행전 12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환난과 박해와 순교로 인해 교회가 더욱 더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손길을 더욱 강하게 체험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행12:1-5).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지라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행12:16-17). 결국 예루살렘교회는 그 시초부터 그리고 그 성장 과정에서 환난과 박해와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면서 전도하고 봉사하고 선교하는 참 교회로 발전했습니다.

둘째, 서머나 교회도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닌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계시록 2장과 3장에 기록되어있는 일곱 교회들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교회였고 주님으로부터 가장 큰 칭찬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돈이 많은 부자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사데 교회처럼 크고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가지고 있던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가난한 교회였고 궁핍한 교회였습니다. 환난과 박해를 받던 교회였습니다. 즉 가난과 궁핍과 환난을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게 칭찬과 권면과 축복의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8-10).
여기 묘사된 서머나 교회의 표지는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옥에 던짐과 죽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주후 155년경 서머나의 투기장에서 가장 위대한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폴리캅이 순교의 형장에서 남긴 마지막 고백과 기도의 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주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을 새롭게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섬겨왔소. 그리고 그 분은 나에게 한번도 잘못하신 일이 없소.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소.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들의 수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인하여 그리고 모든 것을 인하여 나는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을 송축하며 당신께 영광을 돌립니다.” 서머나 교회는 교회 역사상 가장 이상적이고 가장 모범적인 교회로 존재했습니다.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가장 뚜렷한 표지로 지녔기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이 세상에 존재했던 참된 교회들은 환난과 순교를 그들의 표지로 지녔습니다.
교회사가들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이상적인 교회는 처음 300여 년 동안 로마 제국 안에 존재했던 초대교회와 16세기와 17세기 영국과 미국에 존재했던 청교도들의 교회라고 말하는데, 초대교회와 청교도들의 교회의 특징은 환난과 순교를 저들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던 점이었습니다. 처음 300여 년 동안의 초대교회의 역사는 환난과 박해와 순교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열 번의 대 박해가 있었고 수 십만 명의 순교자들이 순교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서기 203년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순교한 페르페투아의 순교의 이야기는 가장 감동적인 순교의 이야기들 중의 하나입니다. 페르페투아의 순교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로마 황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치하인 서기 203년 북아프리카 칼타고에서 두 젊은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Perpetua)라는 26살의 여성과 그녀를 돕는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여성이 함께 투옥되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어린 아기의 엄마였습니다. 감옥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페르페투아의 아버지가 찾아와서 딸에게 기독교의 신앙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인 나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아버지는 다시 찾아와서 아직 젖을 떼지 못한 갓난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신앙을 버릴 것을 간곡하게 울면서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페르페투아의 신앙을 움직일 수는 없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천국을 위한 기쁨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페르페투아는 기도 속에서 환상을 보고 감사하면서 그의 신앙을 지켜나갔습니다. 드디어 페르페투아의 처형의 날이 왔습니다. 미친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그녀는 곧 죽지 않았습니다. 페르페투아는 피를 흘리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습니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찔리게 되었습니다. 갈비뼈를 심하게 찔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검투사에게 목을 쳐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페르페투아의 순교는 한 사람의 순교로 허무하게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순교의 피를 흘린 칼타고에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스승인 터투리안과 어거스틴이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터투리안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된다.”
조선의 교회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었던 것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환난과 순교의 표지였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성경 말씀 중에서 그 어느 말씀 보다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인 계2:10 말씀을 가장 보배로운 말씀으로 붙들고 환난과 순교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조선 교회를 가장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투옥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1939년 2월 첫 주일 산정현 교회로 달려가서 엎드려 기도한 후 주일 예배를 인도하면서 환난과 순교에 대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산정현 교회에서 주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조만식 백인숙 안이숙 유계준 방계성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날 주기철 목사님은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것이 주기철 목사님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열백 번 죽음은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리오! 오, 주여! 이 목숨을 아끼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장기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이길 수 있으나 오래 끄는 장기간의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두 번에 주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 달, 두 달, 일 년, 십 년, 계속되는 고난은 견디기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만 타협하면 살려 주는데, 용감한 신자도 넘어지게 됩니다. 하물며 나같이 연약한 약졸이 어떻게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어 배기겠습니까? 다만 주님께 의지할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십자가! 십자가! 오직 내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우상 때문에 정절을 잃어버리지 못합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 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에 내 예루살렘아! 영광에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세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라.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에 내 영혼을 받아 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나 내 목숨 끊어질 때에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의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케 하사 영광의 조건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아멘.”
이것은 설교라기 보다는 한 영혼의 처절한 부르짖음이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영광스러운 기도였고, ‘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질문하던 베드로의 참회의 기도였고, 사도 바울의 승리의 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선 교회가 지녔던 환난과 순교의 표지였습니다. 바로 그 뒤를 손양원 목사님이 따라가셨습니다. 1950년 9월 28일 밤 11시 공산당에 의해서 총살당해 순교하신 손양원 목사님의 시신을 바라보면서 정양순 사모님은 다음과 같이 흐느끼면서 속삭였습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되셨군요. 평소에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하셨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님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시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녔던 신앙의 표지였고 조선교회가 지녔던 교회의 표지였습니다. 조선교회는 그 시초부터 1950년대 까지는 그래도 환난과 순교를 교회의 표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회개도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지난 50여 년 동안 한국교회는 환난과 순교를 모르는 세속화된 모습으로 변질해갔습니다. 회개도 점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부흥과 성장에만 모든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자기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교회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고 기업의 확장과 같은 지 교회 또는 지 성전의 확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세속화 및 기업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교회에 하나님께서 아프간 사태를 일어나게 하신 것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회개를 되찾고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 찾으라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아프간 사태가 일어난 후부터 아프간의 가즈니로 달려가서 고통 당하고 있는 우리 젊은이들 인질들과 고통을 함께 하가 싶은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되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탈레반들에게 인간적은 호소를 하다가 제가 대신 인질로 붙잡힐 각오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정부가 허락하지 않았고 말 못할 사정 때문에 그 일이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 사태를 통해서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새기게 되었는데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환난과 순교에 대해서 고백한 말씀들을 생각하면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과 순교를 가장 높이 예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1장에서 사도 바울은 환난의 의미에 대해서 진술했는데 환난에 대해서 진술을 하면서 제일 먼저 사용한 말이 괴롭다는 말도 아니었고 싫다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찬송하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3-9).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자기가 받는 환난의 의미 네 가지를 진술했습니다. 첫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둘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환난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셋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그리스도의 환난에 참예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넷째로 환난을 받으므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된다고 진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환난을 싫어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을 좋아하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구핍과 핍박과 곤난을 기뻐하노니”(고후12:10). 그리고 환난을 당당하게 맞았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5). 사도 바울은 환난을 당하는데 그치지 않고 순교를 사모하기까지 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찌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빌2:17).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0,21).
오늘 아침 참된 교회의 표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된 교회가 지녀야 할 표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참된 교회가 지녀야 할 여러 가지 표지를 말할 수 있지만 가장 근본적인 표지는 주님 자신이 지녔던 표지인 십자가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지니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고후4:10). 여러분 모두가 문자적으로 다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여야 하고 십자가의 죽음을 죽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가 다 스데반 집사가 되어야 하고 페르페투아 여 성도가 되어야 하고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최소한 오늘의 한국교회가 환난과 순교의 정신을 되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최소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가 지녀야 할 표지가 부와 명예가 아닌 환난과 순교라는 사실을 바로 가르치고, 최소한 한국교회의 몇몇 지도자들이 그 길을 걸어가므로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문자적으로 고난과 환난에 당하지 않는다면 지금 세계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난과 환난과 순교를 당하는 형제 자매들의 고난과 환난에 동참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 무정하고 너무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감사한 것은 저는 이번 아프간 사태로 인해서 우리의 지체가 당하는 고난과 환난과 순교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가슴으로 받으므로 말씀을 맺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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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 김명혁 목사 2007-09-15 1667
464 김명혁 목사 2007-09-09 1767
463 김명혁 목사 2007-09-02 1723
462 김명혁 목사 2007-08-26 1695
김명혁 목사 2007-08-19 1668
460 피터 바이어 2007-08-1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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