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수요강해 | 칼럼


  김명혁 목사
  교회는 어떤 곳인가?(16) “처음 사랑을 되 찾아야 하는 곳”
  

교회는 어떤 곳인가?(16) “처음 사랑을 되 찾아야 하는 곳” 2007. 10. 28.
계2:1-7

인간의 사랑은 숙명적으로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부부의 사랑도 변합니다. 자식들의 사랑도 변합니다. 부모의 사랑도 변할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도 변합니다. 목회자의 사랑도 변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사랑이 지닌 숙명적인 비극과 불행입니다. 사랑이 변하고 멀어질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낍니다. 사랑이 회복되고 가까워질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인 크라이슬러는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이란 곡을 작곡해서 아름답고도 슬프게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마르티니가 작곡한 “사랑의 기쁨” 이란 노래의 가사를 읽어보면 사랑의 기쁨 가운데도 사랑의 슬픔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랑의 기쁨은 한 순간이지만 사랑의 슬픔은 영원하죠” 라는 가사가 흐릅니다. 조수미씨는 “Love is just a dream” 이란 노래를 부르며 꿈 같은 사랑의 외로움과 슬픔을 노래했습니다. 오늘 아침 설교의 서론이 좀 이상해졌습니다. 인간의 사랑이 숙명적으로 지닌 슬픔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지닌 주님께 대한 사랑에도 변심과 배신이 있을 수 있다는 슬픈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그렇게도 사랑하시던 에베소 교회가 주님께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모습을 바라보시면서 슬픈 마음으로 편지를 써서 보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선교여행을 할 때 즉 서기 55년경에 소 아시아에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 2차 선교여행 끝에 에베소에 잠시 들려 복음을 전하고 충실한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거기 머물러 있게 하고 자기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갔다가 다시 에베소에 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잠시 떠난 동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첫 사랑을 몽땅 쏟아바치면서 아볼와 에베소 사람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 다시 돌아와서 거이 2년 반 동안 그 곳에 머물면서 사랑과 정성과 눈물을 쏟아 부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에베소에서 어떻게 열과 성을 다해서 목회를 했었는지를 사도행전 20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7-21). 사도 바울이 에베소를 떠난 후에는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목회를 했고, 디모데가 에베소를 떠난 후에는 사랑의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머물면서 사랑의 목회를 했고, 전설에 의하면 나중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 와서 기도하면서 생을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결국 에베소 교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요한이 겸손과 눈물과 사랑으로 목회한 곳이었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디모데가 사랑과 정성을 쏟은 곳이었고 성모 마리아가 기도하면서 생을 마무리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내려다 보셨을 때 40여 년 전에 저들이 주님을 향해서 지녔던 처음 사랑이 변질되었고 상실된 것을 바라보셨습니다. 에베소 교회뿐이 아니었습니다. 소 아시아에 존재하고 있던 일곱 교회들 대부분이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점점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상실한 교회도 있었고 믿음을 상실한 교회도 있었고 음행의 죄를 범한 교회도 있었고 거이 죽은 교회도 있었고 세상적인 부요함에 푹 빠진 교회도 있었습니다. 제가 40년이란 말을 자주 하는 대로 40여년 동안 처음 신앙과 처음 사랑을 순수하게 유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40여년 동안 처음 신앙과 처음 사랑을 순수하게 유지하는 사람은 참으로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처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점점 잃어가고 있던 소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그 당시 존재했던 역사적인 교회들이었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교회들을 가리킨다고 성경학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서 소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내려다 보시다가 밧모 섬에서 죄수의 생활을 하고 있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때는 서기 95년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의 손을 빌어서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셨습니다.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1:4). 제일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낸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였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첫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에게 써서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편지를 써서 보내시는 주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계2:1). 주님은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분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계1:20).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불완전하고 문제가 많지만 주님께서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에 붙잡고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세상에 교회들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으로 붙잡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른 손에 붙잡힘을 받고 있는 교회의 사자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들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주님께서 부활 승천해서 하늘에 계시지만 동시에 교회들 사이를 걸어 다니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도 계시며 그 가운데로 걸어 다니신다는 말씀입니다. 새벽마다 성도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는 곳에도 계시며 그 가운데로 걸어 다니신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너무 고마운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얼마나 축복 받은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고 계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네가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정과 형편을 소상하게 알고 계신다는 것은 고마운 일인 동시에 두려운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소상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옛날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주님은 우리들의 모든 것을 소상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의 행동도 아시고 우리들의 마음의 생각도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도 아시고 우리의 약함도 우리의 실수도 우리의 넘어짐도 모두 소상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는 분은 교회의 사자들을 오른 손에 붙잡고 계시는 분이시고, 교회와 성도들 사이를 걸어 다니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우리들의 사정을 소상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둘째, 편지를 써서 보내시는 주님께서 먼저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주님은 책망의 말씀을 하시기 전에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수가성 여인과 대화하면서도 그녀를 어느 정도 인정하셨고 칭찬까지 하셨습니다. “네 말이 옳도다 네 말이 참되도다”(요4:16,1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 백부장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나아와서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간구했을 때 그를 대단하게 칭찬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열두 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겉 옷을 만졌을 때 예수님은 그녀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9:22). 예수님께서는 뽕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기를 원했던 세리장 사캐오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과거를 캐 묻는 대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19:9).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들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책망하시기 전에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감격하면서 고백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사울에게 충성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역과 불충성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사울을 충성되이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아마 사울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서 통곡을 하면서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또 돌렸을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의 사랑의 변심과 사랑의 배신을 바라보시면서 슬픔에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에 무서운 책망과 심판을 쏟아 부어야 마땅한 배신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게 칭찬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랑 없는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는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저들의 사랑 없는 믿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사랑 없는 진리 투쟁은 아무 소용이 없는데도 저들의 사랑 없는 진리 투쟁을 칭찬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

셋째, 편지를 써서 보내시는 주님께서 본심을 들어내시면서 책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지적하시면서 그것을 책망하셨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감동적인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뜨거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실 요나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나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털끝만큼도 품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욘4:1,2).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나 옆에서 기도하는 한 세리에 대한 사랑은 조금도 품지 않고서도 유창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사랑을 잃어버린, 유창하고 뜨거운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몸을 불 사르는 헌신 봉사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도, 그렇게도 신신당부하셨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에베소 교회가 40여 년이 지난 지금 다 내어버린 슬픈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저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내어 버렸느니라”(계2:4). 너무나 서글픈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랑에 대한 말씀을 너무 많이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이 다 포함되어 있느니라”(마22:37-40).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푼 자는 천국에 들어가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은 자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느니라”(마25:45,46).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그리고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21:15). 주님께서는 물론 믿음도 예배도 봉사도 전도도 가르쳤지만 사실은 회개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을 몸소 삶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주님께서 몸소 삶과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살과 피를 몽땅 쏟아 부어주시면서 용서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면서 죽음에서 살아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을 가르쳐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주님 자신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의 더러운 발을 친히 손으로 씻겨 주시면서까지, 우리의 더러운 병든 몸을 친히 손으로 만져 주시면서까지, 용서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저들의 사랑과 우리들의 사랑이 점점 식어져 갔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저들의 사랑과 우리들의 사랑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쥐 꼬리만한 헌금이 아깝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저녁 예배 시간과 새벽 기도회 시간이 점점 아깝고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아니고 나 자신이 우리의 삶의 목적으로 바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짐과 동시에 성도들에 대한 사랑도 식어졌고, 주님의 종들에 대한 사랑도 점점 식어졌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식어졌습니다. 모두가 무관심의 대상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불평 불만의 대상으로 바뀌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사랑의 변심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줄 알고 위선을 떨면서 그럴듯하게 살아가지만 주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한 집에서 사는 강아지도 누가 자기를 좋아하고 누가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들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랑의 변심을 알지 못하시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면서도 10년 20년 30년을 기다리시고 40년을 기다리시다가 결국 우리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가 지금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한 마디였습니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2:4). “나는 지금도 너희를 사랑하고 있는데 나는 너희를 위해서 항상 살아서 기도하고 있는데(히8:25), 너희들은 사랑도 기도도 다 내어 벼렸느니라.” “너희들은 나에 대한 사랑은 다 내어버리고 그 대신 세상과 돈과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치하고 말았노라.” 너무나 슬픈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힌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통곡하고 통곡해도 모자랄 너무나 슬픈 내용의 편지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호소하시면서 소원하시는 것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되 찾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것은 생각하며 돌이키라는 말씀이고 생각하며 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처음 은혜 받았던 곳으로, 처음 구원의 감격을 누렸던 곳으로 되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출애굽의 장소로 되돌아가라는 말씀이고 십자가 아래로 되돌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처음 행위 곧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체험과 주님을 사랑한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은 지금이라도 사랑의 장소인 십자가 아래로 찾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아래서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가슴으로 받아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몸과 가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7:47). 베다니 마리아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몸과 가슴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 여인은 모두 사랑의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도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평생 지니고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예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그리고 지금 우리들을 향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 사랑의 감격을 되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데마와 그레스게와 디도처럼 주님 사랑과 바울 사랑을 버리고 세상으로 간 사람들을 향해서 처음 사랑으로 되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무서운 저주가 임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처음 사랑을 되 찾지 아니하면, 주님께서 임하셔서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시겠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5절을 읽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2:5). 너무나 무서운 말씀입니다. 촛대를 옮기시겠다는 말씀은 교회를 없애버리시겠다는 뜻이라고 박윤선 목사님이 해석을 했습니다. 신자를 없애버리시겠다는 뜻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 무서운 말씀입니다. 기독교는 회개의 종교이고 사랑의 종교인데 회개도 하지 않고 사랑도 되 찾지 않는 형식적인 교회와 형식적인 신자들은 모두 없애버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에베소 교회는 없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저는 최근에 거의 매 순간마다 “주님, 주님” 하고 주님을 부르면서 지냅니다. 운전할 때는 물론이고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도 그렇고 잠 자리에 들어서 꿈을 꿀 때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표시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주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바라보는 표시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제가 김치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다가 보니 저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도 “주님, 주님” 하고 주님을 부르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주님 사랑에 사로잡히고 싶습니다. 저는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웃 사랑에 사로잡히고 싶습니다. 사랑의 감격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공산주의자들도 모슬렘도 모두 사랑하고 싶습니다. 특히 북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저에게 마지막으로 베푸시기를 날마다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 유배에서 풀려나서 다시 에베소 교회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90여세가 된 사도 요한은 단에 올라설 때마다 “소자들아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을 전했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사도 요한을 향해서 오늘은 새로운 말씀을 하시지요 하면 사도 요한은 여전히 “소자들아 내가 다시 말하노니 서로 사랑하라” 라는 같은 말씀을 전했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 말씀 더 드리고 설교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첫 사랑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들의 가슴에 지니고 그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사회에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첫 사랑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지니고 그 사랑을 교회와 가정과 사회에 나타내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첫 사랑을 회복하고 그 사랑을 계속해서 지닐 수가 있습니까?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산 사람들 몇 사람들을 생각해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여인은 주님께 대한 사랑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께 대한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주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 발에 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도 주님께 대한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더니”(요20:11).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항상 주님 곁에 있었고 그리고 자기의 시간과 소유와 몸으로 주님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요한은 어느 제자들보다 주님께 대한 일편 단심의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주님 품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항상 주님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요13:23). 제일 나중에 사도가 된 바울도 주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사랑의 노예가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부은 바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바울 자신이 고백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됨이니”(롬5:5).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를 정도로 불가능한 사랑을 터트려 나타내며 산 사랑의 사도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습니까? 나환자들을 자기 몸과 가슴에 품으면서 자기를 불 살았고 마귀 새끼 같은 안재선을 자기 몸과 가슴에 품고 자기를 불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보배들 중에서 가장 신비롭고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신적인 선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만이 인간에게 선물로 주실 수 있는 가장 신비롭고 가장 따뜻하고 가장 아름다운 신적인 보배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보배를 지니고 행복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그 보배를 지니지 못하고 불행하게 삽니다. 저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은 그 사랑을 지니고 행복하게 살았고 가룟 유다와 데마는 그 사랑을 지니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4:10). 저는 그저 주님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주님 사랑에 사로잡히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이웃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이웃 사랑에 사로잡히고 싶습니다. 저는 그저 사랑의 감격에 사로잡혀서 살다가 죽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교회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와 우리 교회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사랑을 가지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오늘 아침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마음을 활짝 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처음 사랑을 모두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처음 사랑을 가슴에 지니고 그 사랑을 나타내 보이면서 남은 생애를 복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쇄하기] 2007-10-27 21:52:03


   


관리자로그인~~ 전체 609개 - 현재 10/41 쪽
번호
제목
이름
파일
날짜
조회
474 김선도 목사 2007-11-25 1853
473 조향록 목사 2007-11-13 1840
472 정진경 목사 2007-11-09 1882
471 김명혁 목사 2007-11-03 1765
김명혁 목사 2007-10-27 2003
469 김명혁 목사 2007-10-20 1642
468 김명혁 목사 2007-10-13 1965
467 김명혁 목사 2007-09-30 1852
466 김명혁 목사 2007-09-22 1696
465 김명혁 목사 2007-09-15 1667
464 김명혁 목사 2007-09-09 1767
463 김명혁 목사 2007-09-02 1723
462 김명혁 목사 2007-08-26 1695
461 김명혁 목사 2007-08-19 1667
460 피터 바이어 2007-08-13 2129
[7] [8] [9] 10 [11]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