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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누구에겐가 이 이야기를 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기회가 왔습니다.
사실은 망설였습니다. 제겐 참 비밀스럽기도 하고, 쉽게 사람들에게 이야기 삼아 할 수 있는 성격의 이야기는 아니기 때문에. 또한 제 나이가 아직 젊기에 이 이야기는 아직도 먼 훗날까지도 유효한 끝나지 않는 이야기(Never Ending Story)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니 참 궁금하실 것 같네요. 제 신앙의 깊이가 더욱 성숙해지고, 깊어질 수 있었던 시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2 년 전 제 아버지는 여든 다섯의 설을 사흘 남기시고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제 아버지는 20세기의 마지막 설을 천국에서 보내시기 위해 그렇게 가신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 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니 제가 마치 아버지 살아 생전에 굉장한 효녀였을 거라는 뉘앙스를 주는군요. 사실은 아닙니다. 아버지와는 나이 차가 무척 많았기 때문에, 전 아버지와의 세대차이의 벽을 제 스스로가 알아서 단단하게 방어의 용도로 튼튼히 쌓아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 제 스스로 자그마한 위안을 받는 것은 돌아가시기 두 달 전 쯤 노환의 증상을 본격적으로 보이신 후, 제게 주어진 긴 겨울방학 동안 오롯이 아버지 앞에 드려진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20세기의 마지막 겨울, 차가운 올림픽 도로 위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당신의 셋째 딸이 하던 독백의 기도문을 주님만은 들으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전 딸이면서도 제 아버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점은 참 부끄럽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다만 황해도 사리원 태생이시고 이북에 있는 중앙신학대학을 나오신 후, 신학공부를 계속하시기 위해 미국 유학을 무척 꿈꾸셨다는 것과 뜻대로 되지 않으셨다는 것, 그리고 월남하신 후, 저의 엄마를 만나셨고 마흔이 넘으신 나이에 서울살이를, 소시민의 삶을 저의 엄마와 그리고 그 사이의 소생인 네 딸들과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시작하셨다는 것쯤입니다.
유난히 저를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지금도 제 첫 기억으로 선연히 남아 있습니다. 네 살 때인가 한밤중에 자다가 그만 실례(?)를 한 저를 데리고 나오셔서 닦아주시던 아버지의 그 손길의 감촉이 제 첫 기억이었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아버지와의 관계가 나중에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느낌과 아주 유사하게 전이된다고 하는데 바로 아버지는 제게 하나님을 자애롭고, 누구보다도 저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아주 밀착되게 가르쳐 주신 분이셨습니다.
물론 제 아버지는 요즘 아버지들처럼 자상하고, 풍족한 교육적 환경을 제공하신 분은 아니셨습니다. 옛날 아버지의 전형적인 모습인 무뚝뚝함과 무소유를 더 좋아하셨던 당신의 경제관념(?) 덕분에 네 딸들 모두에게 무엇이든 억척스럽게 스스로 해결하게 했던 개척정신을 단단히 심어 놓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른 여느 아버지가 쉽게 주시지 못할 것을 제게 유산으로 물려주신 것은 바로 아버지 자신의 신앙이셨음을 돌아가신 뒤에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병상에 계신 그 두 달 동안 태어나서 아버지에게 그렇게 많이 축복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유언이 되어진,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며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게 남겨진 유언들은 여전히 제 인생에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큰 생명력을 발휘하며 저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두 가지 성격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제가 살아내야 할 일에 대한 것과 다른 하나는 천국을 바라보며 제가 해야할 일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공부의 두각을 보였던 제게 아버지는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라고 누누히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때부터는 자라면서 글짓기에 더 관심을 쏟는 제게 작가가 되어 멋진 책을 쓰라고 자주 말씀하셨던 기억도 납니다. 정작 교사가 되어 교단에 서게 되었을 때도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더 이상 링겔 액이 피속에 주입되지 않아 퉁퉁 부은 당신의 손으로 제 손을 잡으시면서 세상에서 제가 꼭 이루어야 할 일들로 축복하신 말씀은 교장이 꼭 되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귓가에다가 아버지가 속삭이실 때마다, 전 마음속으로 꼭 그렇게 할 것이라는 스스로의 약속을 아버지의 이름 위에 굳게 덧붙이곤 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계시던 어느 날에 아버지는 또 다른 축복을 주셨습니다. 저에게 테레사 수녀처럼 살라는 말씀이셨는데 솔직히 말하면 아버지의 그 말씀이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장신대 교수로 있는 둘째 언니에게는 바울처럼 살라고 축복을 하시고는 제게는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전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도 바울처럼 살라고 축복해 주세요.”라구요. 그런 제 모습을 빙긋이 웃으시며 “그래, 나는 네가 테레사 수녀처럼 사랑과 구제하는 일에 힘쓰라고 한 건데… 바울 사도처럼 살거라.”
얼마 전 아버지의 2주기 추도예배를 당신의 말년에 다니시던 집 근처의 작은 교회 목사님과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드리며 전 이 년 전 감히 야곱처럼 아버지에게 축복을 요구했던 저의 당돌한 모습과 아직도 제겐 하늘같은 바울 사도의 모습을 가늠할 수 조차 없는 큰 차이의 깊이로 의식하면서 왜 내가 그 순간 그렇게 겁도 없이 아버지께 간구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 자신이 있어서, 황금어장인 교단에서 저 순수한 아이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 평생을 청빈과 순종과 사랑의 화신으로 살다 가신 테레사 수녀보다는 더 현실성 있는 꿈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그 축복이 제게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언이었으므로, 제게 신앙의 혈통을 물려주신 제 아버지의 마지막 육신의 말씀이 영화되는 순간이었으므로 저는 죽는 날까지 그 약속에 결코 초연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입으로 시인했던 그 간절한 바램의 최소한의 몸짓이라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여드려야 하겠다는 생각만이 오늘의 제게 가득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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